울긋불긋, 알록달록 지리산줄기에 가까이 다가설수록 자연이 만들어낸 천연빛깔들의 자태가 정말로 황홀하고 경이롭다. 내가 사는 인천 같은 대도시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광경이다.

금속노조 열사특위 지리산 빨치산 역사탐방에 함께하는 우리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조합원 모두 맑고 푸른 자연환경과 경치, 맑은 공기에 즐거워한다. 정신과 기분이 맑아져 가는 모습들이다.

10월 30일 역사탐방에 참가하기 위해 다섯 시간 가까이 이동하느라 따분했지만, 충분히 보상받고도 남을 만한 지리산의 청량감은 불만도 사그라들게 만든다.

숙소는 지리산 하늘 아래 첫 펜션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국립공원 안 산골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은 차를 타고 드나들 수 있지만, 빨치산들이 여기까지 오려면 반나절은 걸렸을 법한 산 중턱이다.

▲ 금속노조 열사특위가 10월 30일부터 31일까지 지리산 일대에서 시행한 지리산 빨치산 역사탐방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재영

전국의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모이다 보니 도착하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모이는 시간까지 여유가 생긴 몇몇 조합원들은 숙소 주변의 퍼진 시큼 달콤한 막걸리와 파전의 기름 냄새를 따라 재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간다.

산골은 빠르게 어둑어둑해졌다. 마주한 가을 쌀쌀한 바람은 지리산 빨치산 역사탐방 강의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지리산을 백번 마주하고 탐방한 강사님의 교육에서 지리산 빨치산 활동의 기원과 배경, 의미, 활동의 절정기, 쇠퇴기, 주요인물, 빨치산 활동의 종결과 전멸의 역사를 들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고 먹먹했다. 잔인한 학살 사실에 어금니를 꽉 깨무는 분노의 감정이 올라옴을 느낄 수 있었다.

학살 사실에 분노가…

한반도 민중은 언제, 어디서, 누구 때문에, 어느 나라 때문에 죽는지 모른 채 허무하게 죽어갔다. 살아남은 빨치산은 지금까지 색깔론과 사상 전향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은 분단 이후 색깔론으로 분열해 있어 안타깝고, 침통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마다 분노와 안타까움을 안고 산속으로 쫓겨왔다가, 산속에서 사라져갔는지도 모른다. 그저 빨치산 대원의 숫자가 많을 때는 2만 명 정도 세를 형성했다는 추산만 전해진다. 수많은 골짜기에서 부모와 자식들은 군경의 총칼에 쓰러져갔다. 복수의 신념과 한 맺힌 피눈물을 흘리고 마지막으로 올려다보았을 하늘…

70여 년이라는 시간 뒤 우리는 그때 그 자리에서 빨치산의 처참한 투쟁과 정신을 노랫말과 구호로 마주했다. 우리는 현장과 삶에서 마주할 억압과 차별, 착취에 대한 투쟁을 결의하게 됐다.

▲ 임권수 노조 인천지부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장이 10월 31일 지리산 활동터에서 생각에 잠겨있다. 박재영

나는 궁금했다. 이렇게 험준한 산세에서 어떻게 몇 년씩 활동했을까? 하루만 굶어도 쓰러질 거 같은데 산에서 도대체 뭘 먹고 버텼을까? 방한 장비가 제대로 없던 산속 추운 겨울 날씨에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버텼을까? 굶어 죽고, 얼어 죽고, 토벌대에 총 맞아 죽는 일을 언제, 어디서라도 맞닥뜨릴 각오를 한 생활이었을 것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길목의 쌀쌀한 날씨에 출근선전전을 마친 뒤, 손가락이 얼얼해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것도 무뎌지는 추운 날씨를 체감하며 산속 빨치산 생활을 떠올렸다.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을 한국전쟁과 연결 짓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빨치산 활동은 일제강점기 시대에도 활발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산속으로 들어갔던 청년, 학생들이 함양지역의 서부 경남의 출신 젊은이들과 합류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지리산 빨치산 활동이 시작됐다고 한다.

빨치산은 억압과 착취 대한 저항

1945년 8월 잠시 맞이했던 해방이라는 시·공간에서 잠시 자유를 만끽했지만,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 세력과 이승만 정권, 미군은 일제강점기 관료와 경찰조직, 행정조직을 재건했다. 이들이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 수탈을 자행했기에, 다시 남한 민중의 거센 저항과 분노를 일으켰다.

해방 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빨치산은 1946년 대구 10월 항쟁과 1948년 2.7 구국투쟁, 1948년 여순항쟁을 계기로 군인들이 대거 빨치산 투쟁에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투쟁력과 조직력을 갖춘다. 이 조직이 게릴라 전투부대, 조선인민유격대남부군단(남부군)으로 전환해 활동했다.

▲ 10월 31일 금속노조 열사특위 지리산 빨치산 역사탐방에 참가한 조합원들이 빨치산 활동터에서 추모의 민중가요를 부르고 있다. 박재영

지리산 빨치산 대원이 이성과 합리적인 판단, 사상과 이론으로 철저하게 무장했더라도, 산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보통사람과 다른 목숨 거는 결단이 있었을 것이다. 산속 생활을 버터야 하는 현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빨치산은 억압과 착취, 수탈에 맞서 항의하고 저항하던 가족과 형제, 친구들이 무참히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빨치산은 인간의 이성으로 감내하기 힘든 산 생활을 분노와 신념, 평등 세상을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와 사상으로 견뎠을 것이다.

지리산에 올랐던 2만 명의 사람에게 산을 오를 수밖에 없던 2만 개의 참혹하고 처참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 삶이 한곳으로 모여 민중 저항의 역사가 탄생한 것이다. 한 개인과 지도자의 탁월한 지도력이 만든 역사가 아니다.

남한은 지주의 억압과 착취, 제국주의 폭력과 수탈에 맞서 저항한 민중의 삶을 부정하고 있다. 저항하는 민중을 폭도와 체제 반란 테러분자 공비로 매도하며 역사와 정의를 부정하는 현실은 아직 진행형이다. 촛불항쟁으로 대통령이 바뀌었지만, 현장 노동자와 민중의 삶은 여전히 처참하고 사회경제 양극화는 점점 더 깊어가고 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불평등 사회구조를 평등하고 차별 없는 세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체제에 저항하는 불순한 세력으로 재단한다. 반역이라고 규정한다. 수많은 민중이 한반도 근현대사에서 더불어 행복하고 평등하게 잘사는 꿈을 파괴하려는 자본과 국가 권력, 제국주의에 맞서 저항했듯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저항하고 반역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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