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광주항쟁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가 계엄군이 전남도청에 진입하기 전날인 5월 26일 남긴 말이다. 1980년 5월 광주의 열사들은 패배를 통해 승리를 보았다.

금속노조의 수많은 열사도 내일의 노동해방을 믿으며 죽음의 고통을 견디었을 것이다. 금속노조 열사들은 온몸으로 길을 열었고, 우리는 매번 동지들의 무덤이 늘어나지 않기를 빌며 그 길로 나아갔다. 금속노조는 열사의 죽음에 빚지며 길을 만들었다.

▲ 금속노조는 5월 22일부터 23일까지 광주항쟁 현장 등을 돌아보는 금속노조 11기 1년 차 열사정신 계승 학교를 열었다. 광주=박재영

지난 5월 22일, 금속노조는 광주항쟁 40주년을 맞아 경남지부와 충남지부 조합원들이 중심이 돼 항쟁 사적지와 망월동 구묘역을 찾았다. 노조 11기 1년 차 열사정신 계승 학교였다.

이번 열사학교 주제는 ‘낮은 곳에 부는 바람, 오월의 기억’이었다. 낮은 곳은 노동 현장이다. 매일 일곱 명이 퇴근하지 못하는, 살기 위해 갔지만, 오늘도 누군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현장이다. 낮은 곳은 노동자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이 하나뿐인 노동자다. 바람은 투쟁이고 변혁이다. 광주항쟁은 좌절했지만, 노동자·민중은 광주의 좌절을 통해 승리를 만들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월의 기억이다.

금남로

첫 방문지는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에 있는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이었다. 기록관은 1980년 5월 항쟁 당시 광주 가톨릭센터였다. 유네스코는 2011년 5월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올렸다. 광주광역시는 광주항쟁 기록물을 체계적으로 수집해 영구보존하고, 민주주의와 인권교육에 활용하기 위해 가톨릭센터를 2015년 5월 13일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으로 개관했다.

기록관 1층은 1980년 당시 가톨릭센터 바닥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로비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구멍 뚫린 유리창이 눈에 들어온다.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총탄이 관통한 광주은행 옛 본점의 실물 유리창이다. 노조 조합원들은 살벌했던 당시를 실감하며 기록관 관람을 시작했다.

1층 상설전시실은 5월 16일 횃불 대행진부터 주요 사건을 중심으로 5.18 기록물을 전시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노동자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계엄군에게 학살된 희생자의 간단한 이력을 사진과 함께 스크린을 통해 볼 수 있다.

조합원들은 당시의 항쟁 거리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 어두운 길에 들어섰다. 유리 바닥 밑 도로에 피 묻은 옷가지와 운동화부터 하이힐까지 주인 잃은 신발들이 나뒹굴고 있다. 조합원들은 당시의 거리에 서서 숙연하게 해설사의 설명에 귀 기울였다.

▲ 전시장에서 찌그러진 양은 함지박 하나를 볼 수 있다. 당시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 먹었던 함지박이다.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상징은 오월 주먹밥이다. 주먹밥을 만들어 함께 나누던 양은 함지박은 해방 광주와 대동 세상을 상징한다. 광주=박재영

전시장에서 찌그러진 양은 함지박 하나를 볼 수 있다. 당시 광주시민들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 먹었던 함지박이다. 올해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 상징은 오월 주먹밥이다. 주먹밥을 만들어 함께 나누던 양은 함지박은 해방 광주와 대동 세상을 상징한다.

5월의 기억이라 이름 붙인 2층 전시실은 각종 기록물과 항쟁 과정 전반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항쟁 당시 여성의 활약을 소개하는 구역에 낡은 재봉틀 하나를 전시하고 있다. 상하맨션 부녀회가 5.18 당시 시신 수습용 마스크를 만드는 데 사용한 재봉틀이다. 마스크는 학살당한 시민들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한 상무관에서 사용했고 남은 마스크는 시민군이 사용했다.

시신 수습용 마스크가 신분을 감추는 복면으로 둔갑해 아직도 북한군 침투로 왜곡되고 있다고 한다. 당시 마스크를 만들어 시민대책위에 전달했던 송희성 전 오월민주여성회 회장(당시 송원여고 교감, 상하맨션 부녀회장)과 시민들은 구속돼 모진 고초를 당했다.

조합원들은 영상실과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오른 광주항쟁 기록물 등을 볼 수 있는 3층 전시실을 지나 6층으로 올라갔다.

기록관 6층에 윤공희 대주교의 집무실과 침실을 복원해 전시하고 있다. 집무실에 ‘진실의 문’이라는 창문이 있다. 1980년 5월 19일 윤공희 대주교는 이 창문을 통해 계엄군에게 폭행당하는 젊은이를 봤다. 창문에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피 흘리는 젊은이를 보고 두려움으로 응급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대주교의 고백이 적혀 있다.

전남도청

5.18민주화운동 기록관을 나왔다. 조합원들은 전일빌딩을 거쳐 옛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1980년 5월 27일 계엄군의 진압 작전에 맞서 끝까지 항전했던 항쟁의 중심지다. 옛 전남도청은 5.18 당시 모습으로 복원 중이었다. 조합원들은 옛 도청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도청 회의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 창문으로 계엄군에 희생당한 시민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한 상무관이 보였다.

▲ 옛 전남도청은 5.18 당시 모습으로 복원 중이었다. 조합원들은 옛 도청 회의실을 둘러보았다. 도청 회의실로 올라가는 계단 옆 창문으로 계엄군에 희생당한 시민의 시신을 임시로 안치한 상무관이 보였다. 광주=박재영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던 5월 21일 이후 시민군은 화순탄광 등지에서 탈취한 다이너마이트와 무기 등을 이곳 도청 회의실 건물 지하에 보관했다. <투사일보> 발행인이자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도 항쟁 마지막 날 이곳 도청 회의실 2층에서 계엄군의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지금은 당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진압 이후 전두환 신군부는 항쟁의 흔적을 모조리 지웠다. 그러나 텅 빈 회의실이 뿜어내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조합원들은 말없이 시민군의 모습을 더듬었다.

조합원들은 광주광역시 북구 수곡동에 있는 망월동 5.18 묘역(구묘역)으로 향했다. ‘망월동 묘지’라고 부른 곳이다. 가족과 친지는 공포와 분노에 떨며 손수레로 희생자의 시신을 싣고 와 이곳에 묻었다.

망월동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다 희생당한 시민군과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은 희생자는 청소차에 실려 이곳에 와 묻혔다. 전두환은 망월동 묘역이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자 1983년 일명 <비둘기 시행 계획>을 세워 보안부대와 지자체, 민간단체 등을 동원 망월동 묘지를 없애려고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5.18 묘역 초입 바닥에 1982년 3월 전두환의 담양군 성산 마을 방문 기념비가 콘크리트 길바닥에 묻혀 일부만 드러나 있다. 1989년 광주·전남 민주동지회가 “북받쳐 오르는 분노와 수치심을 참을 수 없어” 전두환 기념비를 부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참배객들은 “오월 영령의 원혼을 달래는 마음”으로 이 비석을 밟고 묘역으로 향한다.

▲ 녹색 풀빛으로 가득한 묘역을 둘러보며 조합원들은 마지막으로 금속노조 열사의 묘비 앞에 섰다. 조합원들은 열사가 남긴 유서를 읽었다. 함께 어깨 걸고 투쟁했던, 한 번쯤은 집회 현장에서, 거리 선전전에서 마주쳤을지 모르는 동지였기에 열사의 묘비 앞에 선 조합원들은 한 번 더 옷깃을 여미고 묵념했다. 광주=박재영

묘역에 들어서면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잘 알려진 독일 공영방송 NDR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묘비가 있다. 힌츠페터는 광주의 학살 소식을 전 세계에 처음 알렸다. 2016년 힌츠페터 기자가 세상을 떠나자 공로를 기억하기 위해 광주 명예 시민증을 수여하고, 머리카락과 손톱 등을 망월동 묘역에 안치했다. 조합원들은 이곳에서 묵념했다.

녹색 풀빛으로 가득한 묘역을 둘러보며 조합원들은 마지막으로 금속노조 열사의 묘비 앞에 섰다. 조합원들은 열사가 남긴 유서를 읽었다. 함께 어깨 걸고 투쟁했던, 한 번쯤은 집회 현장에서, 거리 선전전에서 마주쳤을지 모르는 동지였기에 열사의 묘비 앞에 선 조합원들은 한 번 더 옷깃을 여미고 묵념했다.

망월동 묘역을 떠나기 전 조합원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뻔한 순서’였을지 모르지만, 집회 때마다 민중의례에서 불러왔던 임을 위한 행진곡과 사뭇 달랐다.

열사의 심장으로 

5.18 민주화운동 기록관과 전남도청, 망월동 묘역 등을 둘러본 조합원들은 숙소로 이동했다. 열사의 삶과 죽음을 깊이 새기기에 시간이 부족한 일정이었다. 조합원들은 쉴 틈도 없이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투쟁 속의 열사,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대식 민주노총 울산본부 열사정신계승특위 위원장 사회로 강웅표 노조 경남지부 열사특위 위원장과 박성호 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열사회 전 회장, 김기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종범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이 토크콘서트 토론자로 나왔다.

▲ 조합원들은 쉴 틈도 없이 토크콘서트 형식으로 ‘투쟁 속의 열사,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정신’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김대식 민주노총 울산본부 열사정신계승특위 위원장 사회로 강웅표 노조 경남지부 열사특위 위원장과 박성호 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열사회 전 회장, 김기수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최종범 열사정신계승사업회 회장이 토크콘서트 토론자로 나왔다. 광주=박재영

토론자들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현재까지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민주노조를 사수했는지 이야기했다. 토론자들은 열사의 삶과 투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며, 박창수 열사, 배달호 열사, 최종범 열사 등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새겼다.

윤상원 열사는 전남도청에서 최후의 항전을 앞두고 어린 고등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며 “우리가 싸울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 후 40년이 지났다. 아직 5.18 광주항쟁의 진상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시민에게 발포를 명령했는지 알고 있지만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역사적 과제는 1980년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바로 지금 노동자의 몫이다. 금속노조의 길을 열어온 열사의 죽음을 잊지 않고, 노동자의 인간다운 삶을 여는 일이 여전히 금속노조의 의무로 남아있다.

광주에서 현장으로 돌아가는 길. 금속노동자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오늘 우리는 승리했다. 그리고 오늘의 역사는 열사를 승리자로 만들었다.”

금속노조는 1986년 박영진 열사(신흥정밀)를 시작으로 2017년 김종중(케이비오토텍) 열사까지 매년 쉰여섯 분의 열사를 추모하고 있다. 현재 노조 열사 정신 계승특별위원회를 비롯해 열아홉 개의 열사·희생자 추모사업회가 열사 정신 계승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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