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노회찬 의원은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82년 서울기계공고 부설 영등포청소년직업학교에 들어가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을 따고 서울과 경기, 인천의 사업장에서 용접공으로 일했다. 1987년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하다 1989년 공안당국에 체포됐다. 노회찬 의원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뒤집어쓰고 징역 2년6개월을 선고받아 실형을 살았다.

1992년 만기 출소 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활동을 시작으로 진보정치의 외길을 걷기 시작했다. 노회찬 의원은 진정추의 사무총장과 대표를 지냈다. 1992년 백기완 대통령 후보 선거대책본부 조직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노동전문 일간지인 <매일노동뉴스>를 창간해 1993년부터 2003년까지 10년간 발행인을 맡았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승리21을 결성해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선후보로 세웠다. 노회찬 의원은 국민승리21의 정책기획위원장으로 일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해 초대 부대표를 맡아 활동했다. 2002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2004년 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으로 출마해 당선, 국회에 입성했다.

노회찬 의원은 17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TV 토론 프로그램에서 “50년 동안 한 판으로 삼겹살을 구워먹어 새까맣게 탔으니 이제 판을 갈아야 한다”라는 비유로 민주노동당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설명했다.

▲ 노회찬 정의당 국회의원이 지난 5월17일 금속노조와 국회 정론관에서 ‘끝나지 않은 유성기업 노조파괴 8년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성민규

국회의원 당선 후 자본과 권력을 비판하는 행동을 이어갔다. 2007년 노회찬 의원은 삼성X파일 녹취록에서 삼성으로부터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검사 일곱 명의 실명을 공개했다. 노회찬 의원은 이 사건으로 명예훼손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6월과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았다.

2008년 진보신당을 창당해 공동대표를 맡았다. 진보신당 창당 직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울 노원 병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선거에서 지며 국회입성이 무산됐다. 2010년 서울시장에 도전했지만 낙선했다. 2011년 진보신당을 탈당해 통합진보당을 창당했다.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통합진보당 후보로 서울 노원 병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돼 국회로 복귀했다. 2012년 통합진보당 부정 경선 논란 이후 통합진보당을 탈당해 진보정의당을 창당했다. 2013년 삼성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징역 4월(집행유예 1년)과 자격정지 1년의 형이 확정됐다. 국회복귀 1년 만에 대법원의 형 확정으로 19대 국회의원직에서 내쫓겼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창원 성산구에서 당선돼 진보정당에서 찾기 드문 3선 국회의원이 됐다. 이후 정의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돼 활동했다. 노회찬 의원은 1992년 진정추를 구성할 때 부터 정의당 의원까지 한국 진보정당 운동의 주역이자 증인으로 활동하며 진보정치의 울타리를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

 

[약력]

1956년 부산 출생.

1982년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취득.

1987년 인천민주노동자연맹 조직부장.

1989년 이적단체 구성 혐의로 체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6월 선고.

1992년 만기출소.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결성. 사무총장, 대표 역임.

1993년~2003년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1997년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초대 부대표.

2004년 17대 총선 국회의원 당선(비례대표).

2007년 삼성X파일 ‘뇌물 수수 검사’ 명단 발표.

2008년 진보신당 창당. 진보신당 공동 대표.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서울 노원 병). 낙선.

2010년 서울시장 출마. 낙선. 

2011년 진보신당 탈당. 통합진보당 창당.

2012년 19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서울 노원 병). 당선.

2012년 통합진보당 탈당. 진보정의당 탈당. 진보정의당 공동 대표.

2013년 삼성X파일 사건으로 징역4월(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 국회의원직 상실.

2016년 20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 (창원 성산). 당선.

2018년 7월 23일 세상을 떠남.

 

조사

노회찬 선배께.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밤새 가르방으로 긁어 유인물로 만들고, 새벽찬 어둠을 뚫고

잰걸음으로 인천, 부천지역 공단 주변 집마다 돌리고

먼 길을 돌아 출근했던 노동자 생활을 떠올립니다.

 

서로 얼굴도 모르고 가명으로 활동한 1986년 늦가을이 생각납니다.

벅찬 가슴 안고 뚜벅뚜벅 걸었던 노동자의 길을 기억합니다.

그 길에서 만난 노회찬 선배.

30년이 지난 오늘 영원한 안식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군요.

 

제가 부족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노선과 조직 이름은 바뀌어도 함께했던 선배였기에,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산별노조 양날개론을 증명해보고자 실천한 선배였기에,

온갖 시련과 갈등이 혼재된 진보정당운동에서 대중적인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였기에,

그저 저는 믿었습니다. 그리고 안일했습니다.

 

예전 조직 활동했던 때처럼 분명하게 비판하고 조직적으로 결정했다면,

이렇게 허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필요할 때만 전화했던 이기심이 부끄럽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선배의 고민을 함께하지 못했던 얄팍함을 반성합니다.

 

선배님, 노동자 민중의 정치를 위해 희망을 만들었던 선배를 존경합니다.

푸근한 호빵맨으로, 적절한 비유로 비판의 경지를 한 단계 높여

대중적인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열어낸 선배의 열정을 사랑합니다.

낮은 울림이 큰 첼로를 연주할 수 있는 정치인으로,

온 국민이 악기 하나쯤은 할 수 나라를 꿈꿨던 선배의 감성을 배우겠습니다.

 

1986년 부천에서 노동자의 길을 시작한 저에게

지난 30여 년 동안 선배와 인연은 일선의 현장활동가로서 가까웠지만,

사안에 따라 다소 멀기도 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울산에서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선배의 지도는 늘 좋았고 명쾌했습니다.

 

갈등했던 기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울산 바닷가 의기투합했던 도원결의는 간직하겠습니다.

선배를 보내는 이 자리는 회한과 슬픔이 앞서지만,

넋 놓지 않고 다시 한번 진보정당운동과 노동운동의 후배로서

선배의 유지를 받아안고, 산 자의 결기로 나아가겠습니다.

 

더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선배를 통해 체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활동하는 동안 놓치지 않고 노동자의 길로 나아가는데

발걸음마다 나지막이 퍼져가도록 더욱더 노력하겠습니다.

 

장례 기간 동안 선배를 추모하는 긴 추모행렬을 보았고,

다양한 국민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선배님, 이제 노동자의 길을 걸었던 노동운동가에서

진정한 정치인으로 우뚝 선 선배이기에

영원한 안식의 공간에서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자유롭게 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광화문 정동길 금속노조 사무실 옥상에서 선배를 기억하며 서성이는데,

붉은 고추잠자리가 제 주위를 맴도네요.

추억과 동심의 잠자리 모습에서 씨익 웃는 선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여

번뜩 내려와 ‘귀로’라는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노래 중에 이런 대목이 제 가슴에 다가옵니다.

 

‘무지개가 뜨는 언덕을 찾아

넓은 세상 멀리 헤매다녔네.

그 무지개 어디로 사라지고

높던 해는 기울어가네.

새털구름 머문 파란 하늘 아래

푸른 숨을 쉬며 천천히 걸어서

나 그리운 그곳에 간다네.

먼 길을 돌아 처음으로.’

 

엄혹했던 노동운동가에서

치열한 진보적인 대중 정치인으로

이제는 자유로운 인간으로

국민 가슴속에 첼로의 운율을 남긴 만큼

먼 길 돌아서 다시 왔습니다.

처음처럼 아가처럼 편히 쉬십시오.

 

노동자의 길을 선배와 같이 걸었던

용접사 금속노동자 김호규가 드리겠습니다.

편집자의 말 : 김호규 노조 위원장은 7월 27일 노회찬 의원 영결식에서 유족의 요청으로 노동계를 대표해 조사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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