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4차 산업혁명’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좌장이셨던 이원보 선생님의 마지막 멘트가 아직도 가슴에 남는다. “4차 산업혁명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따져봐야 하지 않나?” 이 말씀은 나에게 많은 성찰과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그렇지 않은가. 무슨 일을 할 때는 그것이 왜 필요한지 따져보는 것이 순서일 게다. 그래야 구성원들의 공감대가 형성되고, 정당성을 획득하고,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겠나. 필요성을 따지는 것은 이른바 ‘사회적 합의’의 전제조건이 될 터인데,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은 왜 필요한 것일까?

우리에게 4차 산업혁명은 그 필요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마치 ‘필연적인’ 것인 양 순식간에 다가왔다. 이는 ‘다보스포럼’과 ‘알파고’의 위세, 그리고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이 결합되어 일어난 일인 듯싶다. 작년 초 세계경제의 담론을 주도한다는 다보스포럼에서 4차 산업혁명이 주제로 상정됐고, 곧이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자 우리는 인공지능에 대한 놀라움과 경이감에 사로잡혔다. 언론은 연일 신기술의 위력을 기사거리로 만들었고, 우리의 살길은 마치 4차 산업혁명에 달려 있는 듯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치권은 이에 편승, 지난 대선에서 보듯 모든 정당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지원정책을 마구 쏟아 냈고, 현 정부는 대통령 직속으로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렇게 4차 산업혁명은 우리에게 기술 아닌 ‘마술’로 다가왔고, 가지 않으면 안 될 필연적인 길로서 우리를 억눌렀다. 그것이 필연적인 만큼 위협적인 분위기도 자아냈다. 개인이나 기업이나 4차 산업혁명에서 도태되면 그것은 곧 멸망이라는 분위기 말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쟁적 담론은 발전되기 힘들었고, 모두가 4차 산업혁명의 ‘성공조건’에만 귀를 기울였다. 망하면 안 되니까!

그런데 잠깐! 자유로운 사고와 문제제기는 창의력의 원천이고 바로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바일진대, 한 번 거꾸로 생각해 보자. 4차 산업혁명에서 도태되면 정말 우리는 망하는 것일까? 혹시나 그 반대는 아닐까? 다시 말해, 4차 산업혁명이 우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4차 산업혁명의 전파자들은 이른바 ‘창조적 파괴’의 신화를 믿는 네오 슘페터리안적 패러다임에 젖어 있다. 그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바는 급진적 기술혁신을 통한 경제성장이다. 경기침체는 모든 기업들에게 새로운 도전의 장을 만들어주고, 기업가들은 여기서 이기기 위해 기존의 생산모델을 뛰어넘는 급진적 혁신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은 이러한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공해주며, 현 저성장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번영의 길을 터줄 것이라고 믿는다. 때문에 산업정책은 창조적 파괴(4차 산업혁명)를 도모하는 ‘기업가정신’을 고취시키고 실현시키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주는데 주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정부의 4차 산업혁명위원회의 비전도 국가경쟁력과 신성장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을 보면 그 같은 네오-슘페터리안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문제가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얼마나 새로운 것이냐는 문제제기는 차치하고라도, 다시 말해 4차 산업혁명이 기존의 기술과 생산모델을 뛰어넘는 급진적 혁신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과연 4차 산업혁명이 말하는 그 성장과 번영의 비전이 현재의 자본주의체제 내에서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동안 자본주의는 많은 위기를 겪어왔다. 그 때마다 보여준 자본주의의 위기극복 능력은 실로 놀라웠다. 1차, 2차, 3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새로운 기술혁신을 통해 생산력을 증가시키고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전략적 공통점이 있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창출하는 것이었다. 현재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다. 정보통신기술을 전 산업에 적용하여 새로운 상품과 소비를 창출해 신 성장 동력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개의 큰 문제가 놓여 있다.

먼저 언급할 것은 점점 더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와 불안정의 문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정말 좋은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었다 치자. 1:99의 사회에서 과연 이를 소비할 여력은 얼마나 될까? 소비가 발생하지 않으면 결과는 뻔하다. 이윤은 생기지 않고 생산은 다시 줄어든다. 생산영역에 투자하려던 돈은 금융부문으로 옮겨지고 투기자본주의가 번창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는 일이며, 일반 서민들도 여기에 참여하면서 문제는 더욱 커진다. 2008년의 세계 금융위기는 일반 서민들이 투기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면서 발생한 것이 아닌가. 당시 서민들은 오랫동안 정체된 임금을 만회하고 싶어 했으며, 금융권은 이들을 유혹, 마구잡이로 주택담보 대출을 해주었다 사달이 났다.

작금의 금융자본주의는 사회적 양극화와 불안정을 심화시킨다. 금융자본의 엄청난 힘 앞에 사회와 노동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회안전망이 붕괴되고 비정규직이 양산된다. 과거에는 그나마 경제 침체기에 구조조정과 해고의 위협을 느꼈던 노동자들이 이제는 매일 매일 그 위협 속에서 산다. 주기적이었던 위기가 일상화되었다. 이러한 불안정과 1;99의 사회에서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기대한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두 번째 문제는 환경파괴의 문제다. 어쩌면 이는 첫 번째 문제보다 더 큰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지구 멸망의 문제이니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지난 산업화시대가 경제성장은 이룩했어도 지구를 파괴하는 ‘위기사회’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사실 지난날 노사는 분배의 문제에는 대립적이었어도 경제성장에는 한 목소리였다.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에 사회적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당연시 여겼다. 결과는 생태계 교란, 기후변화, 지구온난화, 자원고갈 등 지구 전체의 생존이 걸린 엄청난 문제를 유발했다. 결국 지난날 자본주의가 시도한 위기 극복 전략은 지구를 파괴하는 길로 이끌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으로 우리는 또다시 한 걸음 더 그리로 다가가는 것은 아닐까?

4차 산업혁명을 반대하고자 함이 아니다. 무조건 반대는 무조건 찬성만큼 비합리적인 결과를 낳는다. 따져보자는 것이다. 현 자본주의체제에 담긴 내적 모순을 극복하지 않고 과연 4차 산업혁명이 가능한지를. 자, 그래서 묻는다. 이제 다시 ‘큰 이야기’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이문호 / 워크인조직혁신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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