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들어 한국 경제가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의 전철을 밟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의 와중에서도 한국 경제는 상대적으로 양호한 성장률을 유지했고, 2012년 이후에는 경제성장률이 다시 상승하는 듯했다. 그러나 2015년에 2.6%로 주저앉으면서 2016년도에도 2.7%에 머물렀다.

그런데 최근 경제성장률의 하락이 경기변동적 현상이라기보다는 구조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 추론의 바탕에는 제조업의 위기라는 현실이 있다. 최근에 제조업의 수익률과 경쟁력이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제조업이 고부가가치사업으로 재편되는 산업 진화가 단절되어 발생하는 문제로 이해할 수 있다.

경제가 발전하면서 일반적으로 주력산업이 경공업에서 중화학공업으로, 중화학공업에서 부품소재 및 IT산업 그리고 금융서비스업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따른다. 미국의 경우 1950년대에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5% 정도였으나 2009년에는 14%로 축소되었는데, 금융산업(financial industry)과 IT산업의 급격한 성장이 전통적 제조업의 자리를 대신했다. 이에 반해 독일과 일본은 제조업의 비중이 줄어들기는 하나 주력 제조업이 유지되면서 산업 내에서 고부가가치화라는 진화를 거듭해 왔다.

한국의 경우 197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시작되었고, 이후 자동차, 반도체, 석유화학, 조선, 철강, 가전 등이 주력산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런 중화학공업의 특징은 이른바 장치산업이라는 것인데, 대규모 자본이 필요한 장치산업에서의 궁극적인 경쟁력은 숙련 노동력의 임금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자본이 투자되고 공장이 만들어지면 후발기업이나 국가가 새로운 공장과 공정기술을 이용해 범용재(commodity)를 생산하는 이점을 지니게 된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노동의 숙련도도 증가하게 되고 또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여전히 낮기 때문에 선진 공업국가에 비해 범용재의 가격경쟁력에서 앞서기 시작한다. 한국의 중화학공업의 성장 역시 이런 진화의 과정을 거쳤다.

따라서 새로이 추격해 오는 신흥국이 있다면 범용재의 가격경쟁력을 상실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과거 한국 기업이 일본이나 유럽의 범용재 생산제조업자들을 대체했던 것처럼 중국이나 신흥국이 한국의 범용재 생산자들을 대체하기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과 북유럽 국가들은 고부가가치 중간재 생산과 고부가가치 특수재(specialized product)의 생산으로 산업이 진화해 가면서 고부가가치 중간재나 특수재는 국내에서 생산하고 범용재 사업은 축소하거나 국외 이전을 추진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한국 제조업 위기의 본질은 고부가가치화로의 산업 진화가 단절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양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국 제조업에서 중간재인 부품소재 생산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부품소재 수출의 급속한 증가는 중국 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한국산 부품소재의 대중국 수출이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한국산 부품소재의 선진국 시장에서의 점유율은 오히려 감소했다. 특히 소재부문의 대 선진국 무역역조는 심화되고 있으며, 부품 수출도 IT 관련 품목에 집중되어 있다. 이는 반도체 등 일부 IT 품목을 제외하고는 핵심 제품 및 기술이 존재하지 않고, 현재의 기술수준이 선진기업들에 비해 취약한 실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주력 산업에 속한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와 수익성 악화는 만성적 한계기업인 좀비 기업을 양산하고 있으며, 기업 도산과 이를 막기 위한 구조조정 문제로 비화되고 있다. 제조업의 경쟁력과 수출주도적인 성장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정부는 재정지출과 부동산 경기 활성화를 위한 건설투자를 통해 경기부양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 경제는 기업 부실화와 가계부채 그리고 이어지는 금융 부실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이러한 한국 경제의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개발체제에서 공고화된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경제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새로운 경제체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새로운 경제체제를 필자는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라고 부른다. 사회통합적 시장경제는 정부 주도-재벌 중심의 반(半)계획-반(半)시장 경제가 아닌 약자의 재산권이 보호받는 제도화된 온전한 시장경제와 스스로 돕고 스스로 준비해야 하는 사적 복지가 아닌 제도화된 복지 및 사회안전망을 구축한 체제이다. 이를 통해 한국 경제가 다시 지속가능한 성장의 길로 들어서고 사회적 양극화의 해소가 이러질 수 있다.

그런데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약자의 재산권이 보호와 더불어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가 선결되어야 한다. 재벌체제는 혁신을 통한 산업의 고도화와 고부가가치화를 가로 막는 장애물이 되고 있다. 재벌의 과도한 수직계열화와 일감 몰아주기 관행은 도전 기업에게 혁신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고, 혁신 경쟁의 소멸은 결국 재벌 기업들의 혁신 유인도 감소시키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청기업에 대한 기술 탈취로 재벌 대기업의 하청기업들은 가격경쟁과 단가 후려치기에 내몰리고 결국 혁신할 유인도, 여력도 잃게 된다. 기술탈취와 단가 후려치기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 격차의 근본 원인이 되고 노동 양극화와 사회 양극화를 심화시킨다. 나아가 재벌의 세습이 가능한 상황에서 재벌 총수 일가는 도전 기업의 싹을 자르고 진입장벽을 쌓는다.

한 가지 유념할 것은 공정한 시장질서가 단지 재화시장이나 하도급시장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시장과 금융시장의 공정성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하다. 특히 노동 3권의 실질적 보장과 노동조합 조직률 재고와 같은 노동정책은 노동시장에서 수요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재벌들에 대한 시장의 공정성 제고를 위해서도 필요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해소는 또한 정치적 민주주의의 형해화를 방지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한국 재벌은 순환출자, 교차출자, 지주회사체제 등의 다양하고 복잡한 소유지배구조를 가지고 과도한 수직계열화(over-vertical-integration)와 문어발식으로 다각화(over-diversification)된 사업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렇게 복잡한 재벌의 구조와 심각한 경제력 집중은 기업 거버넌스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만들어 황제경영이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실효성 있는 재벌 개혁을 위해서는 소유지배구조와 기업 거버넌스 개혁 방안을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시행해야만 한다. 이런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개혁을 위해서 2012년과 2013년에 단행된 이스라엘의 기업 거버넌스 개혁과 기업집단의 소유지배구조 개혁 입법을 참고해 볼만 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음은 20세기 초 미국의 진보적 운동에 의해서 이미 인지되었다. 따라서 재벌개혁을 통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바로 잡는 것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믿는 모두가 동참해야 하는 과업이다. 20세기 초 진보적 운동을 통해 경제력 집중을 해소하는데 미국의 민주당뿐만 아니라 공화당의 개혁세력도 동참했었고, 2013년에 이스라엘의 재벌개혁을 주도한 세력도 다름 아니라 우파 정부였다.

그러나 재벌의 경제력 집중이 심각하게 진행된 현재 상황에서 재벌 개혁을 위한 정치적 동력을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의 과도한 정치·법조·언론 등에 미치는 영향력을 통제하는 작업과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의 제도화를 동시에 달성하는 재벌 개혁만이 이런 실타래를 풀 수 있다. 재벌개혁 여부는 결국 국민의 손에 달렸다. 정치인은 국민의 도구일 뿐이다.

박상인 / 서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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