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형 열사를 처음 만난 시기는 2008년경이다. 처음 봤을 때 ‘명랑하고 쾌활한 청년’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같은 조직에서 활동하는 동안 윤주형 열사는 늘 뒤풀이 자리에서 분위기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첫 만남 이후 2년 정도 서로 다른 업체에서 근무해 가깝게 지낼 수 없었다. 2010년 윤주형 열사가 해고되고 내가 교육위원을 하면서부터 가까워졌다. 만남이 잦아지고, 단둘이 술잔을 부딪치며 밤늦도록 흉금을 터놓고 토론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서로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들을 하나둘씩 풀어 놓았다.

내가 한번은 ‘비조합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어렵다’고 토로하자 윤주형 열사는 ‘노동조합에서 책상 하나만 마련해 주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가입시키겠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윤주형 열사는 기아자동차 화성공장 인근 미조직노동자들의 조합원 가입운동, 보수적인 화성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한 시민 선전전과 퍼포먼스 계획 등 여러 아이디어를 내고 함께 해보자고 제안하곤 했다. 늘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열사의 진취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고 윤주형 동지 화성장례대책위원회’가 2013년 2월7일 경기도 화성시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에서 윤주형 열사 장례식을 치르고 있다. <노동과 세계>

윤주형 열사는 당시 해고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미소를 가득 담은 모습으로 동지들을 대했다. 노동자, 민중이 푸대접받는 사회, 거꾸로 가는 사회를 바꾸는 방편으로 민주노동당 활동을 열심히 했다. 열사는 대학 시절부터 민주노동당 경기도당, 수원청년회에서 활동하며 사회의식을 키워왔다.

윤주형 열사는 이상욱 동지와 함께 2011년 기아자동차 구속노동자를 지원하는 ‘기아자동차 구속·해고·고소고발·손배가압류 분쇄를 위한 현장석방대책위원회’ 활동을 했다. 김수억 동지와 이동우 동지가 출소하자 네 명이 기아차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아래 해복투)를 결성했다. 곧이어 후원회가 창립됐고, 해복투는 후원에 힘입어 공장 내 복직투쟁과 장기투쟁사업장 연대를 비롯한 전국희망뚜벅이, 희망광장 등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윤주형 열사는 언젠가 해복투 후원회를 통해 들어온 생계기금을 배분한 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혼자라 돈 쓸 데가 별로 없고, 어느 동지는 아주 어려운데 똑같이 받는 것이 미안해요. 어려운 동지들이 더 쓸 수 있도록 들어온 후원금을 한 곳에 두고 각자가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면 어떨까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윤주형 열사가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이런 활동 속에 윤주형 열사의 의식이 크게 변한 것 같다. 열사는 남 못지않게 조직에 충성했지만, 변화 이후에 조직에 날 선 비판을 서슴지 않으며 조직원과 자주 부딪히곤 했다. 윤주형 열사는 노동조합의 정파 갈등과 관료주의를 거침없이 비판했다. 단둘이 만났을 때도 내게 서로 형님, 아우 하는 조직 문화를 비판하며 목소리 톤을 올렸던 기억이 난다.

윤주형 열사는 논리가 아닌 지위로 사람을 윽박지르는 행동을 아주 싫어했다. 열사는 “형 믿지? 형을 못 믿냐?”는 말을 조롱하는 투로 자주 흉내 냈다. 열사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직을 탈퇴했고, 나는 몇 달을 더 고민하다 탈퇴했다.

해고자 전원복직 희망의 끈을 잠시도 놓지 않았던 열사는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2013년 우리 곁을 영영 떠났다. 윤주형 열사는 4년간의 해고생활과 투쟁으로 지쳐있었고, 2012년 임금‧단체협상 투쟁에서 끝내 복직이 되지 못하자 많이 힘들어했다. 윤주형 열사는 유서에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구요”란 말을 남겼다.

우리가 늘 부르짖는 열사정신 계승은 뭘까. 진정한 열사정신 계승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해고자 전원복직이다. 누구는 빠지고 누구는 현장으로 돌아가는 선별복직이 아니라 모든 투쟁하는 노동자의 원직복직이 윤주형 열사가 평생 꾸던 꿈이다. 이때야 비로소 투사들이 우후죽순처럼 튀어나와 천민자본주의를 뒤엎을 수 있다.

장대전 기아자동차지부 사내하청지회 화성분회 조합원

 

윤주형 열사 약력

 

2007년 기아자동차 화성 도장공장 (구)기현업체 입사,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선봉대 소대장 활동

 

2008년 기아자동차지부 47년 차 대의원 및 민주노총 중앙 파견대의원

 

2008년 11월 기현업체 강제 전환배치 저지 투쟁, 조합원 원직 사수 쟁취

 

2009년 기아자동차지부 48년 차 대의원

 

2009년 5~6월 기현업체 XW바디 일방투입 저지와 신규인력채용 투쟁

 

2009년 8월 기현업체 단협파괴 조합활동 탄압 관리자 퇴출투쟁으로 면직

 

2009년 12월 노노갈등 분쇄, 정상적인 노사관계 쟁취를 위한 끝장 단식투쟁

 

2010년 4월20일 기현업체, 문자메시지로 해고 통보

 

2011~2012년 김수억, 이동우 구속자 석방대책위원회 활동, 기아차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결성, 정리해고-비정규직 철폐 투쟁 전개

 

2013년 1월28일 기아자동차 자본의 부당해고로 인한 고통으로 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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