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가 2016년 11월9일 거둔 대선 승리는 미국 사회와 전 세계를 충격에 몰아넣었다. 대선 이후 민주당 후보가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버니 샌더스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란 추측이 나왔다.

영국 언론 <이코노미스트>가 2016년 10월 초 실시한 정치인 호감도 조사에서 버니 샌더스는 모든 후보 중 가장 호감도가 높았고, 비호감도보다 호감도가 높은 유일한 후보였다. 힐러리 클린턴은 호감도 45%가 비호감도 53%보다 8%, 도널드 트럼프는 호감도 34%가 비호감도 63%보다 29% 낮은 반면 버니 샌더스는 호감도 59%가 비호감도 33%보다 무려 26%나 높았다.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버몬트의 조용한 혁명

1941년 뉴욕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버니 샌더스는 1960년대 초반 시카고대학에 다니면서 학생운동에 입문했다. 인종평등회의(CORE)와 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SNCC) 등 대표 흑인 시민권 운동단체에서 활동하며 초기 반전평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1968년 버몬트로 이주하면서 버니 샌더스의 조용한 혁명이 시작됐다. 버니 샌더스는 1970년대 초반 활발한 지역 운동을 벌이면서 정치에 뛰어들었다. 주지사와 상원의원 선거에 세 차례 출마해 낙마했지만 결국 1981년 벌링턴 시장에 당선됐다. 버니 샌더스는 3연임 시장으로 재직하면서 시민 중심 시정을 펼쳐 정치 기반을 닦았다.

▲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이 보여준 역동성은 민주-공화 양당을 뛰어넘는 3당의 가능성을 확인해줬다. 선거 이후 버니 샌더스는 현장과 지역에서 진보 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재단 <우리의 혁명>을 조직했다. 분노와 혐오의 정치, 도널드 트럼프가 이끄는 1%의 정치에 맞선 희망의 풀뿌리 정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진=<로이터>

1990년 버몬트주 하원의원 선거에서 승리한 후 유일한 무소속 사회주의 의원으로 4선 의원(1990-2005년)을 지냈다. 버니 샌더스는 2006년 상원의원에 선출됐고 2012년 73%의 높은 득표율로 재선했다. 마침내 2015년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 독자 후보가 아닌 민주당 후보의 길을 선택했다.

 

99% 풀뿌리 정치혁명

2015년 4월30일 공식 출마선언 이후 버니 샌더스는 월스트리트의 1%에 맞서 풀뿌리를 대변하는 선거운동을 벌였다. 2012년 가을 미국을 강타한 월스트리트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버니 샌더스 캠페인으로 되살아났다.

샌더스는 1%의 지배와 이로 인한 민주주의 파괴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고용과 성장에 기반한 경제정의와 사회정의, 민주주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기득권 세력과 신자유주의 폐해에 대한 샌더스의 강력한 비판은 강한 공감을 얻었다. 그가 제시한 사회주의에 가까운 비전도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2016년 2월1일 아이오와주 코커스에서 시작한 예비선거가 6월14일 워싱턴 DC 프라이머리까지 4개월 보름의 대장정을 거치는 동안 샌더스는 정치혁명을 이어갔다. 버니 샌더스는 2월 초 뉴햄프셔에서 첫 승리를 거두면서 힐러리의 압승을 예상한 언론의 편견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3월1일 슈퍼 화요일의 선전에 이어 3월 말~4월 8대1 압승을 거두면서 샌더스 혁명은 정점에 올랐다.

▲ <이코노미스트> 2016년 10월 초 실시한 정치인 호감도 조사 도표.

버니 샌더스는 57개 선거구 중에서 23곳에서 승리를 거뒀고 1,300만여 표(43.13%)를 얻었다. 예비선거 선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내 권력집단인 수퍼대의원에서 570.5 대 43.5로 현격히 밀렸고 7월 전당대회는 힐러리 클린턴을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택했다.

 

풀뿌리의 힘, 소액기부와 자원봉사의 물결

버니 샌더스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선거운동을 벌였다. 이 선거운동에 수십만 명의 ‘버니스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했다. 2016년 본격 선거운동에 들어가자 샌더스 지지자들의 집회에 수만 명이 몰려들었고 힐러리나 트럼프 집회 규모를 압도했다.

샌더스는 이 과정에서 무려 2억3천만달러(2천5백억원)의 선거자금을 모았다. 총액은 2억8천만달러의 힐러리 클린턴보다 적지만 소액 개인기부금은 더 많이 모금했다. 클린턴이 8천5백만달러를 고액기부로 모은데 비해 샌더스 모금액의 99.32%가 상한액 2천7백달러의 개인헌금이었고 59.03%는 200달러 이하의 소액기부였다. 소액기부의 평균액수는 27달러, 기부자는 무려 250만명이었다.

 

샌더스 정치혁명의 의미

버니 샌더스는 결국 민주당 지도부의 일방적인 힐러리 편들기와 주류 언론의 편견 속에서 정치혁명을 완수하지 못했다. 샌더스는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후보였다. 버니 샌더스 이전 사회당 후보 유진 뎁스(1881~1940)가 1920년 대선에 옥중 출마해 얻은 91만 표가 역대 최고 득표였다.

수많은 현장 노동자들이 지지단체(Labor for Bernie)를 통하거나 개인으로 샌더스의 정치혁명에 동참했지만 다수 노동조합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역사적으로 민주당과 유착한 기성 노동조합들은 아래로부터 터져 나오는 풀뿌리 민주주의를 외면했다.

버니 샌더스의 선거운동이 보여준 역동성은 민주-공화 양당을 뛰어넘는 3당의 가능성을 확인해줬다. 선거 이후 버니 샌더스는 현장과 지역에서 진보 후보를 지지하기 위한 재단 <우리의 혁명>을 조직했다. 분노와 혐오의 정치, 도널드 트럼프가 이끄는 1%의 정치에 맞선 희망의 풀뿌리 정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원영수 <국제포럼>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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