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돈 288억 걷은 K스포츠 재단 이사장은 최순실 단골 마사지 센터장’, 9월20일자 <한겨레> 1면 단독기사 헤드라인이다.

박근혜 정권의 기행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풍문으로만 떠돌던 비선실세 존재가 드러나야 했지만 최순실은 마치 영화 <해리 포터> 시리즈에서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로 나오는 악의 화신 볼드모트와 같았다. 그의 이름을 거론한 인물과 언론사는 남김없이 철저한 보복을 당했다. 보수진영의 총아 조선일보조차도 무릎을 꿇고 입을 다물었다.

<한겨레>가 나섰다. 불러서는 안 되는 이름을 1면 헤드라인에 올려 정권이 기를 쓰고 파묻으려하는 진실을 알렸다. 9월20일 특종을 시작으로 정국을 뒤흔들 보도를 연달아 내보냈다. 머뭇거리던 다른 언론사들도 뛰어들면서 권력의 부나방과 재벌의 끔찍한 민낯이 드러났다. 최근 SBS가 방영한 박근혜 5촌 형제 살인사건에 이르기까지 스릴러 영화 같은 의혹과 사건 폭로가 봇물 터지듯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돌이켜보면 박근혜 집권 4년은 2012년 선거운동 기간에 벌어진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사건부터 시작해 2013년 철도 민영화, 2014년 세월호 참사, 2015년 메르스 사태와 백남기 농민 죽음, 2016년 사드배치 합의에 이르기까지 초대형 사건과 사고로 점철돼있다.

4년 내내 쌓였던 대중의 분노는 이미 지난 4월 국회의원 선거에서 누구나 바랐지만 아무도 예상 못한 새누리당 참패라는 결과로 드러났다. 이 와중에 이른바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막장 사건’인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분노는 한계치를 넘었고 시민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민주노총을 필두로 하는 민중총궐기투쟁본부가 10월29일 1차 범국민행동에 나서면서 광장을 열자 예상을 뛰어넘는 분노와 요구가 분출했다. 1차 투쟁에 고무된 민중총궐기투쟁본부는 백남기 농민 영결식을 함께 치룬 11월5일 2차 범국민행동 참석 인원을 당초 4만여 명으로 예상했지만 실제로는 20만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을 느낀 시민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중은 단순히 박근혜 퇴진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정권 입맛에 맞추고 강압에 굴복하는 해바라기 검찰과 언론에 대한 개혁 요구에서부터 대를 이어 정경유착을 벌이며 정권과 공생한 재벌제체에 대한 처벌과 개선을 요구했다. 심지어 재벌이 추진했던 노동개악 등 이른바 ‘박근혜 정책’ 폐기를 스스럼없이 외치기도 한다. ‘직선제 쟁취’라는 민주주의 형식에 대한 단일 요구로 모아진 1987년 투쟁과 다른 점이다. 국회 앞에 모인 노동자, 시민들이 12월9일 박근혜 탄핵 가결 소식을 듣고 환호하고 있다. 사진=김형석

주말 집회와 시위를 거듭할수록 참가규모 기록을 경신했고 12월3일에는 전국에서 232만여 명이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집회에 참석했다. 유사 이래 최대인파가 정권퇴진 투쟁에 나섰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라 불리던 한국 정치구도가 요동쳤다. 정치인들이 ‘혁명적 상황’이라며 두려워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형식을 요구한 1987년 투쟁, 내용을 채우자는 2016년 퇴진 투쟁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킬 정도로 폭발적이고 끈질긴 이번 대중 투쟁은 여러 방면의 평가 지점을 남기고 있다. 진행형인 투쟁을 놓고 평가하는 것은 섣부른 시도지만 역사의 중요 고비마다 강력한 투쟁을 벌여 지배자의 전횡을 응징해온 한국 민중의 기풍이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여지없이 작동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한국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다수 신생국가들처럼 부패와 쿠데타를 반복하는 고만고만한 독재국가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저력에는 이 같은 대중 저항과 투쟁 역할이 크다.

흔히 이번 투쟁을 1987년 민주화 투쟁과 비교하곤 한다. 우리 사회는 1987년 직선제 헌법 쟁취와 1992년 대선을 거치면서 절차 민주주의를 완성했다고 여겼다. 자기 목소리를 낼 시민사회 형성, 노동조합 조직, 진보정당 설립 등은 1987년에 쟁취한 민주주의의 형식에 상응하는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늘리기 위한 노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이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 절차적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을 느낀 시민들은 광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대중은 단순히 박근혜 퇴진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정권 입맛에 맞추고 강압에 굴복하는 해바라기 검찰과 언론에 대한 개혁 요구에서부터 대를 이어 정경유착을 벌이며 정권과 공생한 재벌제체에 대한 처벌과 개선을 요구했다. 심지어 재벌이 추진했던 노동개악 등 이른바 ‘박근혜 정책’ 폐기를 스스럼없이 외치기도 한다. ‘직선제 쟁취’라는 민주주의 형식에 대한 단일 요구로 모아진 1987년 투쟁과 다른 점이다.

김남국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2월19일자 <한겨레> 칼럼에서 “2016년 한국의 촛불집회는 1987년 체제 이후 절차적 민주주의 아래서 성장한 독립적인 개인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그 숫자도 놀랍지만, 그들의 주장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부패한 권력을 비판하고 법과 원칙이라는 민주주의의 추상적 가치들을 지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 후퇴라는 세계적인 흐름을 뒤바꾼다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남국 교수는 나아가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이 촛불집회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점, ‘재벌도 공범이다’라는 구호가 보여주듯 촛불집회가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구조적 모순으로 눈을 돌린다는 점에서 혁명적 성격을 갖는 측면이 있다”고까지 평가했다.

 

탄핵 이후…누구의 정치인가

여러 변수가 있고 분석마다 차이가 있긴 하지만 다수는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판결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우리 헌법상 탄핵 후 두 달 안에는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한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최종 확정하면 바로 대선정국으로 이어진다.

금속노조는 이 같은 정세에 대응해 청산하고 개혁해야 할 과제로 ▲노동개악 완전폐기 노동부장관 퇴진 ▲재벌총수 구속과 재벌 노무정책 전면개혁 ▲노조파괴 근절과 현안문제 해결 ▲노동자 일방희생 구조조정 폐기와 제조업 발전방안 마련 등 당면한 4대 요구를 제출했다.

민주노총은 박근혜 즉각 퇴진과 박근혜 정책 폐기를 위한 요구안에 더해 ‘2017년 대선 민주노총 정책 의제’를 다듬어 제출할 예정이다.

문제는 기성정치가 압도적인 다수 노동자와 사회 구조적 모순에 눈을 돌린 시민이 요구하는 사회변화 과제에 부응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구심이다.

이는 민주노동당 분당 이후 지리멸렬한 ‘노동자 중심’ 진보정치 부재에 기인한다.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이끌었던 진보정치가 좌초된 현재, 시민사회만으로는 형식적 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진보와 변혁 과제를 추진하기 난망한 상태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고지를 수십 년 동안 차지하고 앉아있던 극우-보수정당이 원래의 자리인 바닥으로 끌어내려진 지금, 정권교체 열망은 더할 나위 없이 강하다. 현실 정치 일정이 확정되는 순간 대중은 ‘어느 당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로 급속히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

뾰족한 대안이 없는 이상 노동조합과 조합원도 예외는 아니다. 민주노총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온 수백만 시민 ‘그 가운데 하나’로 남는다면 탄핵 이후 정치 주도권은 완전히 보수 야당으로 넘어가게 된다.

▲ 한국 민주주의의 형식을 만들어 30년을 보낸 이른바 ‘1987년 체제’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대다수 시민들에 의해 내용을 채우며 재구성될 다음 세대 민주주의 역시 일단 한 번 구성되면 쉽사리 바꾸기 힘든 체제가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금속노동자에게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11월26일 ‘박근혜 정권 퇴진 국민비상행동’이 주최한 ‘박근혜 즉각 퇴진 5차 범국민행동’에 190만 명(서울 150만, 전국 40만)이 모여 한목소리로 박근혜 정부 퇴진을 외쳤다. 사진=신동준

이 같은 현실에서 민주노총이 박근혜 퇴진 투쟁 과정에서 집약한 과제 실현을 위해 택할 수 있는 전략은 많지 않다.

일각에서는 민주노총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가능성이나 실현해야 한다는 당위 자체에 부정적 판단을 내기도 한다. 이런 전제라면 우선 민주노총은 기존 야당과 정책협약을 맺어 제도적, 정책적 이득을 취하는 대신 유력 대선 후보를 비판적 지지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총의로 이 같은 비판적 지지 방안을 결정할 수 있다고 예상하기는 어렵다. 그만큼 민주노총은 민주노총을 구성하는 조직별 조건과 입장에 따라 정치적으로 분화돼 있다. 보수 야당이 조합원 기대를 충족할 만큼 지속적으로 진보, 변혁 과제를 수행해 나갈 것으로 기대하기도 힘들다.

또는 당분간 정치활동과 정당선택은 지역과 현장, 조합원 개인에게 맡기고 민주노총은 조직과 투쟁 사업에 집중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민주노총이 가진 계급 대표성이 떨어지고 있고 거의 유일한 산별노조인 금속노조 역시 산별 교섭에 대한 전망을 마련하지 못한 채 대공장 정규직 귀족노조로 고립되고 비난받는 상황이다. 민주노총 차원의 전략과 실천 없이 개별판단에 맡겨서 당면한 과제 실현을 위한 토대 구축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더욱이 제각각 갈린 진보정당이 각자 경쟁적으로 노동자 조직에 나설 경우 민주노총 역시 내부 분화가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민주노조가 민주노총으로 총단결한 한국과 달리 해외에서는 정당과 총연맹(내셔널센터)이 각자 노선별로 나눠진 사례가 흔하다. 한국과 비교하면 사회적 토대가 상대적으로 단단해 노조나 진보정당이 존립에 대한 걱정보다는 각자 노선 실현에 집중할 수 있는 사회에서나 가능한 형태다.

 

금속노동자가 택할 다음세대 민주주의는

이 같은 고민 속에서 최근 민주노총이 택해 논의하고 있는 전략은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조합원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올해 10월 정치현장특별위원회(아래 정치현장특위) 구성을 결정한데 이어 12월2일 정치현장특위가 제출한 정치전략 토론안을 확정했다.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는 12월15일 회의부터 민중경선단일후보 전술 등 ‘새로운 정치세력화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대선투쟁 사업계획 논의를 시작했다.

민주노총 정치현장특위가 제출한 전치전략 토론안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민주노총은 한국사회의 진보변혁적 재편 전망을 제시하고, 노동자계급의 단결 원칙하에 민주노총이 주도하고 조합원이 중심에 서는 새로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

2. 민주노총은 2017년 대선에 대응해 민중단일후보 전술을 채택하고, 대선 실천단을 구성해 이를 뒷받침한다.

3. 민주노총은 2017년 대선투쟁을 통해 진보정치세력의 외연 확대 및 연대를 강화해 성과를 중심으로 진보정치세력의 대연합(진보연합정당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한다.

4. 민주노총은 2018년 지방선거 이전에 제 진보정당을 아우르는 대연합의 상을 결정한다.

5. 민주노총은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농민-빈민 등 대중조직과 함께 추진한다.

6. 민주노총은 진보대연합을 위한 노동자 추진위원회를 구성한다.

핵심적으로는 민주노총이 이번 대선에서 ‘민중 단일후보 전술’을 채택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동자-농민-빈민 대중조직은 물론 진보정당까지 함께 진행하는 ‘민중경선’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아울러 대선을 승리로 이끌고 현장의 참여를 극대화하기 위한 ‘대선 실천단’을 구성하고 이들이 대선 이후에도 민주노총의 주요한 정치부대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내용이다.

대선 이후에는 2018년 지방선거 이전까지 단일정당의 필요성과 민주노총 내외의 다양한 정치적 이견과 각 정치세력의 가치를 존중하는 제도를 갖춘 연합정당을 창당하겠다는 계획이다.

금속노조는 12월7일 중앙집행위원회를 열어 민주노총 정치현장특위 토론안과 민주노총 중앙집행위원회가 제시하는 대선까지의 로드맵을 바탕으로 내년 1월 중순까지 정치위원회와 각 지부 운영위원회 이상 회의단위에서 토론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당면한 정세와 일정에 비해 논의하고 준비할 시간은 빠듯하다. 각자 셈법에 따라 정치일정을 세우고 이해득실을 따지는 기성 정치권은 민주노총 논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광장을 가득 채우며 요구를 관철시켜나가고 있는 대중은 의욕이나 의지보다는 능력을 보고 냉정히 판단할 뿐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형식을 만들어 30년을 보낸 이른바 ‘1987년 체제’가 다음 세대로 넘어가고 있다. 대다수 시민들에 의해 내용을 채우며 재구성될 다음 세대 민주주의 역시 일단 한 번 구성되면 쉽사리 바꾸기 힘든 체제가 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금속노동자에게 선택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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